[김학수의 사람 '人'] "어리숙한 사람이 운좋게 살아남았다"...국내 첫 퍼블릭골프장 시대를 연 올림픽CC 이관식 회장의 반전있는 삶 |
김학수 기자, 작성일 : 2021-11-26, 조회수 : 1763 |
어느덧 골프장에는 오색찬란한 가을을 지나 잿빛의 초겨울이 내려 앉았다. 올림픽CC는 홍명희의 ‘임꺽정’, 황석영의 ‘장길산’의 대하소설에서 도적떼의 무대로 등장하는 고양과 파주 경계의 혜음령 자락에 위치해 있다. 조선시대 도적들이 극성을 부릴만큼 수림이 울창한 골프장은 모두 짙은 낙엽으로 변해 있었다. 올림픽CC로 들어가는 초입에 돌비석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허심종도(虛心從道)’. 도로 오른편 기슭 화강암에 써 있는 글자이다. 돌비석에 노자가 한 말이라고 써있는데 뜻은 마음을 비우고 도를 따르라는 의미이다. “골프장에 들어설 때는 욕심을 버리고 순리에 따라 운동하라는 의미에서 새겼다”는게 이관식(74) 올림픽 CC 대표이사의 말이다. 하지만 욕심을 버린다고만 해서 되는게 아니라는 것쯤은 골프 고수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안다. 골프장에 올 때까지만해도 설레는 마음을 갖지만 막상 필드에 서면 달라지는게 골프이니까 말이다. 여러 번 골프장에 오면서도 돌비석에 눈이 가지 않았던 것은 왜 그랬을까. 앞만 보고 운전을 해 옆으로 시선이 가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골프장에 왔다는 안도감과 설레임, 좀 더 잘 쳐보겠다는 자만심 등이 교차하면서 돌비석에는 애초 관심이 가지 않았을 듯하다. 골프를 치러 가지않고 이 대표와 인터뷰를 갖기 위해 골프장을 찾았을 때는 평소 안보이던 것이 보이는 느낌이었다. 골프장 입구 돌비석, 1백년 이상된 수령의 소나무, 멀리 보이는 북한산 삼각산까지 새삼 다르게 보였다. 이 대표를 오래전부터 알았다. 그는 체육인, 언론인, 교수, 기업인 등 다방면에 걸쳐 경력이 다채로운 우리나라 사회 지도급 인사이다. 경복중학교 시절, 아이스하키를 시작해 중동고를 거쳐 연세대에서 2학년까지 학교 대표선수를 지낸 정통체육인 출신이다. 연세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뒤에는 1969년 한국일보 견습기자 25기로 입사, 5년간 체육기자로 활동했다. 당시는 한국보다 잘 살았던 태국 방콕, 필리핀 마닐라 등으로 국제대회 취재를 다니면서 “세상이 넓구나”라는 것을 깨닮고 기자생활을 접고 1975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미국 애리조나주립대 선더버드 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인 MBA를 취득한 뒤 새로운 사회생활을 하게됐다. 다국적 기업인 폴라로이드사에서 극동 마케팅 매니저로 보스턴 본사를 거쳐 일본 도쿄, 홍콩에서 근무하며 풍부한 경험을 쌓았다. 1986년 미국 피자 체인점 피자인을 들여와 국내에서 첫 피자 사업을 시작해 66호점까지 개설하며 피자사업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88년에는 국내 첫 9홀 퍼블릭골프장인 올림픽CC 허가를 받아 1991년 개장했다. 1990년대말 제5대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KLPGA0 회장을 지냈으며 한국스포츠산업협회 회장, 한국스포츠미디어학회 회장, 경희대 골프학과 교수, 고려대학교 사회체육학과 교수, 성공회대 재단이사를 역임했다. 올해 5월 연세체육회 제26대 회장으로 선임됐으며 6월 (재)연세문화체육재단 이사회에서 만장일치로 제2대 이사장으로 추대됐다. 올림픽콜로세움 대표이사로 올림픽CC, 씨티칼리지를 운영하며 활발한 사회활동을 하고 있다. 운동선수, 기자와 사업가, 교수, 체육단체장 등을 넘나들며 다양한 삶을 산 이 대표를 만났다. 올림픽CC, 한국골프장 퍼블릭 시대를 열다 올림픽CC는 국내 1호 퍼블릭골프장이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벽제동에 위치한 올림픽CC는 1988년 서울올림픽 직후 한국골프의 대중화를 선도하며 국제 규격 코스의 국내 최고 수준의 9홀 골프장이다.올림픽 CC가 올림픽이라는 말을 붙이게 된 것은 이 대표가 예전 스포츠기자를 한 인연 때문이었다. 1970년대 초반 한국일보 체육부 기자로 5년여간 활동한 그는 자신이 스포츠기자로 한 경험과 함께 한국에서 사상 처음으로 올림픽을 개최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올림픽CC라고 이름을 지었다. 한때 IOC 관계자들로부터 올림픽이라는 말은 IOC만의 고유 저작권에 해당한다며 사용중단을 권고받기도 했다. 하지만 김운용 전 IOC 위원 등이 올림픽은 일반 명사로 많이 쓰인다는 점을 들어 오륜마크 문양만 쓰지 않으면 큰 문제가 없다는 유권해석을 받아 현재까지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올림픽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골프장으로 운영하고 있다는게 그의 설명이다 -골프장 사업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원래 골프장으로 쓰는 땅 14만평은 아버님(고 이제민 연세대 상과대학교수)께서 1961년 매입을 했었다. 평양이 고향인 아버님은 교수 은퇴이후 북녘 땅이 가까워 군사보호구역으로 된 이 땅을 샀다. 1980년대 초반 국민은행에 5억원에 팔려고 했다가 매각이 어렵게 되면서 내가 골프장 사업을 하는게 낫겠다는 생각을 갖고 뛰어들게 됐다.” -국내에서 첫 퍼블릭골프장이면서 계단식 골프코스공법으로 처음 지은 골프장인데. “경사가 심한 악산이라 처음에는 골프장 건설에 엄두가 나지 않았다. 군사보호구역은 당시 이 지역을 관할하던 육군 사단장께서 잘 해결해 주셨으며, 골프장 건설은 태릉골프장에 계셨던 육사 출신의 골프장 설계가 장정원씨가 ”골프장을 계단식으로 만들면 가능하다“는 의견을 주셔서 공사에 들어가게 됐다. 1988년 서울올림픽 때 처음으로 퍼블릭골프장으로 허가를 받아 1990년 3월 개장할 수 있었다.” -올림픽CC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된 것은. “우리 골프장은 강북권에서 15~30분, 일산권에서 20분 이내로 도심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전홀 라이트시설을 완비해 출·퇴근 골프가 가능한 선진국형 골프장이다. 특히 골프를 배우는 초보자들이 우리 골프장을 거쳐 골프에 입문한다. 우리 골프장에서 자랑할 수 있는 것을 ‘맛’이다. 클럽하우스 음식이 대한민국 골프장에서 가장 맛있다고 자부한다. 주변 골프장에서 왔던 이들이 우리 골프장에 와서 음식을 먹고 갈 정도이다. 또 골프장 최초로 음식 포장도 된다. 공치신 분들이 포장을 해서 가시는 분들도 있다.우리 골프장은 이경진, 이혜숙 등 연예인들도 자주 찾는다. 수년전 한국엘리트체육의 본산인 한국체대 골프 선수들 훈련코스로도 제공하고 있다. 임성재, 이정은6 등 미국 PGA와 LPGA에서 활동하는 선수들과 유해란, 박현경 등 국내에서 정상권으로 뛰는 선수들이 우리 코트에서 자주 훈련을 한다. ” -코로나 19이후 골프장 상황은. “골프장을 운영하면서 느끼는데 골프 비즈니스도 생물같다고 생각한다. 처음 골프장을 시작할 때는 골프장 수가 부족했다. 휴대전화가 생기면서 모든 이들이 골프를 치면서 업무를 봐 골프인구가 늘었다. 또 박세리, 최경주가 뜨면서 골프 인구가 크게 증가했다. 하지만 그 이후 일시적으로 주춤하는 듯 했지만 코로나 19이후 골프인구가 외국에 나가지 못해서 국내 골프장으로 몰려왔다. 또 젊은 사람들이 스크린골프를 즐기면서 골프인구가 다시 늘었다.” -골프인구가 늘어나면서 생기는 문제점은. “골프 방송에서 예능으로 골프프로그램을 보여주면서 일부 사람들이 매너에 문제를 보인다. 골프가 갖는 정통성, 매너, 배려 등이 예전보다 많이 사라지는 것 같아 안타깝게 생각한다. ” 이 대표는 아이스하키 운동선수답게 골프도 잘 친다. 생애 베스트 스코어는 올림픽CC서 기록한 74타. 아직 홀인원을 하지 못했지만 장타자로 이글은 수도없이 많이 해봤다. 한국일보 체육부 기자시절인 1970년대 초반 당시 군자동에 위치해있던 서울컨트리클럽 연습장에서 처음으로 채를 잡으면서 골프와 첫 인연을 갖게됐다. 미국 유학시절 도시 주변에 골프장이 많기로 유명한 애리조나주 피닉스에서 골프장이 동네 커뮤니티로 활용돼 결혼식장, 각종 회합 장소 등으로 이용되는 것을 보고 선진국 골프장 경영의 좋은 선례를 경험할 수 있었다. 아직은 국내 골프장 여건으로 볼 때 쉽지 않은 일이지만 말이다. 국내골프장에서 가장 먼저 올림픽CC가 라이트시설을 갖추게 된 것은 미국 골프장에서 배운 것이라고 한다. PGA 필 미켈슨과 한때 LPGA에서 활약했던 박지은이 그의 애리조나주립대 동문이다. 아이스하키 선수출신으로 성공한 원동력은 -상대 출신으로 현재 골프장뿐 아니라 음식점, 교육업체, 병원 임대업 등 여러 사업을 하고 있는데. 학창 시절은 어땠나. “지금과 같은 사업을 하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경복중에서 아이스하키를 시작한 뒤 경복고 시험에 떨어지고 2차인 중동고에 아이스하키 선수로 스카우트되면서 학교 대표선수로 줄곧 활약했다. 얼마전 조선일보 아카이브에서 내가 고등학교 선수로 뛰던 때의 기사가 실린 것을 찾아 볼 수 있었다. 대학은 아이스하키 선수로 들어가 연세대 경영학과를 다녔다. 당시 아버님께서 학교에서 국제화폐론 과목을 가르쳤는데 나는 일부러 아버님이 가르치는 과목을 피해 다른 교수님의 강의를 들었다.” 66학번인 이 대표는 연세대 국제 상경연우회에서 활동을 하며 국제 비즈니스 감각을 익혔다. 연세대 상대 동기로는 구학서 신세계 부회장이 있다. 당시 아이스하키는 실업팀이 없던 시절이라 그는 대학 졸업 직전 은행으로 가려다가 마침 한국일보에서 기자모집을 해 역동적인 기자의 매력에 이끌려 체육기자가 됐다. 체육기자를 하면서 해외 취재를 하러 갈 기회가 많아 외국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감수성이 예민했을 어린 나이에 운동을 했고 체육기자까지 하면서 체육인의 세계가 전부인줄 알았지만 막상 외국에 나가보니 ‘세상은 넓구나’라는 생각을 갖게 되면서 새로운 삶을 준비했다 . -폴라로이드, 피자인 사업으로 기반을 탄탄히 다졌는데. “다국적 기업인 폴라로이드와 피자인 사업을 하면서 기업이 어떻게 하면 흥하고 망하는지를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기술력에서 앞섰던 폴라로이드는 새로운 변화에 적응하지 못했으며 창업자가 손을 놓고 전문경영인에게 기업을 맡겨 무너졌다. 아무리 우수한 인적자원을 갖고 있더라도 위기의식없이 방만하게 경영을 하면 기업은 망할 수밖에 없다. 미국에서 마케팅 공부를 한 게 큰 도움이 됐다. 1980년대 초반 칼라TV 시대를 맞아 신용카드에 얼굴 사진을 쓰는 사업을 국내에서 처음으로 도입해 주목을 받았다. 1983년 국민카드에 얼굴 사진을 칼라로 찍어 크게 성공시켰다. 피자인도 압구정 1호점을 시작으로 피자붐을 일으키며 66호점까지 확대한 뒤 지분을 매각했다.“ -사업가로 활동하면서 대학교수와 KLPGA 회장, 스포츠학회 수장으로 활동을 했는데. “경희대에서 골프학과가 생기면서 스포츠마케팅과 골프 산업을 잘 아는 나를 교수로 초빙했다. 또 골프장을 운영하니까 IMF때 KLPGA 회장자리를 맡게됐다. 고려대 사회체육학과는 나의 전문성을 고려해 초빙교수로 스카우트 됐다. 스포츠산업협회는 김종 한양대 교수가 만들어 함께 운영했으며 스포츠미디어학회는 내가 처음으로 창립해 체육학계와 언론계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하는 학회로 발전시켰다.” 그는 KLPGA 회장때 안타까운 일로 물러난 것을 아직도 아쉽게 생각한다. 박세리가 1998년 US오픈에서 첫 우승을 차지하며 한창 주가가 오른 뒤 1999년 연말 당시 신낙균 장관 등을 초대해 남산 하이야트호텔에서 환영 파티를 준비했다. 하지만 박세리가 예상치 않게 불참하는 바람에 주인공 없는 환영 파티가 된 뒤 KLPGA 회장을 사임했다. 운좋게 살았던 시대, 앞으로는 전문가가 성공한다 -그동안 성공할 수 있었던 동력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나. “어리숙한 사람이 운좋게 살아남았다고 본다. 체육은 체육대로 매력이 있었다. 투박하고 다듬어지지 않았지만 체육인들은 의리가 있고 올바른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 언론인들은 정의감이 넘치고 도리와 한계를 잘 안다. 교수를 하면서 학생들과 같이 공부하고 연구하며 보람을 많이 느꼈다. 여러 사업을 통해 경제적 안정을 찾으면서 세상을 보는 눈을 배울 수 있었다.앞으로는 우리 시대와는 달리 전문가가 성공하는 시대가 될 것이다. ” -성공회대 재단 이사 연세 체육회 회장 등 사회 단체 봉사를 하고 있는데. “기회가 되면 사회에서 얻은 것을 다시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능력은 부족하지만 봉사와 배려로 사회를 위해 활동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한 마음을 갖는다. ” 그는 슬하에 2남1녀를 두고 있다. 큰 아들은 자신의 뒤를 이어 경영수업을 하고 있으며 둘째 아들은 홍익대 경영학과 교수로 있다. 딸은 용인대 체육학과 교수로 근무하고 있다. 많은 지인을 갖고 있는 그는 언론계에선 한국일보 동기생 이황 기자로 친하게 지냈는데 최근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 상실감이 컸다고 한다. 대학 동기로는 고려은단 조창현 회장, 학계서는 고려대 위성식 명예교수와 가깝게 지낸다. 굴곡많은 한국 현대사를 고스란히 품고 다채로운 삶을 산 그는 이제 마음을 비우고 담백하게 여생을 즐기며 살고 싶다고 끝을 맺는다. [김학수 마니아타임즈 편집국장 kimbundang@maniareport.com] 출처 : http://www.maniareport.com/view.php?ud=2021112613505768795e8e941087_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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